잿빛 하늘이었다.
하지만 그런 어두운 하늘과는 어울리지 않게,
단 한 줄기의 달빛만으로도
이곳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 속에, 나는 홀로 서 있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 맨살처럼 시린 몸.
내 것이 아닌 붉은 피로 물들은 이 낡은 옷은
안 입은 것만 못했다.
나는 그저,
텅 빈 거리 골목에서 주저앉아 떨고만 있었다.
"괜찮니?"
희미해지는 시야 속,
한 쌍의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따뜻한 손길에 안심한 걸까
나는 조용히, 그대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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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아 언니!!
오늘은 오빠 말고 내 쪽 도와주면 안 돼?!"
붉은 생머리를 하나로 묶은 막냇동생 웬디가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내 팔에 매달렸다.
"주방도 바쁘다고!"
"오빠는 엄마랑 아빠도 있으니까 괜찮잖아!!!"
주방에서 중단발 정도의 붉은 머리를 질끈 묶은 둘째, 에드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채소를 손질하고 있었고,
웬디는 도끼눈을 하고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알았어, 웬디 걱정하지 마.
오늘 낮에는 주방, 저녁에는 서빙 도와줄 거야."
"진짜? 언니!! 최고야 정말!! 고마워!!"
그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웬디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끌어안고 볼에 뽀뽀를 해왔다.
사실 나는 서빙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검은 곱슬머리에 보랏빛 눈동자.
이질적인 외모는 항상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특히나 붉은 머리의 어머니와 갈색 머리의 아버지 사이에서, 이 머리 색은 너무도 튀었다.
그저 그런 이질적인 외모를 보고 흥미 삼아 다가오는 이들도 있었고, 대놓고 우리 가족을 두고 내기를 거는 무례한 손님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런 말을 감내하기엔, 내게 이 가족은 너무나 소중했다.
물론 그들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 아니다.
하지만 상냥한 부모님 덕분에
나는 단 한 번도,
이 집의 '진짜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루비아, 시장에서 감자랑 향신료 좀 더 사 와줄 수 있니? 재료가 조금 부족하구나."
"네, 어머니. 금방 다녀올게요."
튜베로즈 식당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조금 쌀쌀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이곳 아도니아 왕국의 수도는 깎아지르는 듯 높은 산들로 주변을 이루었고, 끝없이 펼쳐진 만년설로 산 위에는 항상 눈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겨울에는 모든 것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웠고, 여름에는 덥기는 했지만, 다른 곳에 비해 시원한 편이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감자 세 바구니만 주실 수 있어요?"
"루비아구나.
아침에도 사 갔는데 오늘 손님이 많은가 봐?"
"저녁에 단체 손님이 있어서요.
점심 영업도 못 하고 계속 준비 중이에요."
우리 가족이 운영하는 튜베로즈 식당은 수도에서 꽤 유명한 가게다.
물론 평민들이 이용하는 곳이기 때문에 보통은 귀족들이 와서 먹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이상하게도 왕국의 기사들은 자주 찾아와 단체로 식사하고 가기도 한다.
기사 중에서는 평민도 있지만 귀족들도 있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들이 단체 예약을 하는 날이면 평소보다 더욱이 신경 써야 한다며 점심부터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뭐, 기사들이 올 때는 짜증 나게 하는 손님들이 없으므로 좋기는 해도...
그들이 정말 많이 먹고, 마시기 때문에 피곤한 것은 똑같다.
어머니의 심부름이 끝나고 가게 정리와 요리하는 것을 돕다 보니 어느새 하늘은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밖으로 나가 영업 중이라고 팻말을 돌리기 무섭게 저 멀리서 기사들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서 오세요~!"
"오오, 웬디씨 오늘도 예쁘십니다!"
환하게 웃는 웬디를 보며 몇몇 기사들이 얼굴을 붉히며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워낙 웬디가 예뻐서 그런지 그녀를 보려고 오는 손님들도 있어 익숙하기도 하고, 동생도 그런 반응이 싫지는 않은지 더욱 환한 미소로 그들을 반겨주었다.
영업이 시작하고 나서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주문에 영혼이 나가는 느낌이었다.
"주문하신 튜베로즈 맥주 5잔 나왔습니다."
신난 기사들로 인해 시끌벅적한 가게 안이었지만 언제나 조용한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귀족 가문 자제들이 포함된 테이블이었다.
특히, 그들 사이에서 단연코 눈에 띄는 사람은
아도니아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 가문인 카멜리아스 백작가의 둘째 아들, 에델베인 카멜리아스이었다.
기사로서 유명한 것도 있었지만
"언니 오늘도 너무 빛나고 계신다... 그치?"
그의 잘생긴 외모도 한몫 했다.
'신이 황금빛 비단에 달빛을 뿌려 빚은 남자'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은빛에 가까운 금발은 결마다 은은한 곱슬이 살아 있어,
가볍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조차 장인의 손길처럼 정제되어 있다.
밤하늘처럼 짙고 깊은 푸른 눈동자는 살짝 내려앉아 있어 슬쩍 보면 강아지를 닮은 듯했지만, 누구도 가볍게 볼 수 없는 차가운 날을 품고 있다.
오뚝한 콧날과 선명한 붉은 입술은 과하게 아름다워
'전쟁에서 마주치면 사랑에 먼저 빠질 얼굴'
이라는 농담까지 돌 정도다.
기사답게 단단한 체격과 커다란 키까지
그는 그 존재와 실력으로, '왕국의 빛나는 검'이라는 칭호라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나 무표정과 과묵한 분위기 때문인지 쉽게 다가갈 수는 없는데—
그게 좋은 거라나 뭐라나
잠시 주문이 끊겨 숨을 돌릴 틈이 생기자, 웬디와 함께 주방 앞에 서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정신없이 오가던 시선 사이로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
놀랐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갑자기 웃기에는 너무 어색했고,
급히 시선을 피하면 실례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무표정으로 얼굴을 유지한 채
눈길을 거두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노....놀래라....'
놀란 가슴을 몰래 진정시키고 금세 밀려드는 주문에 바쁘게 움직였다.
소문과도 같은 외모와 분위기였지만,
무언가 소문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영업이 끝난 후, 가게 안엔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가족들은 하나같이 의자에 쓰러지듯 몸을 던졌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없어 보였다.
"쓰레기... 쓰레기라도 버리고 올게요... 다들 좀 쉬고 계세요."
"루비아.. 고맙다"
"언니 짱이야...."
"누나 사랑해"
"고맙다 딸...."
지친 하루로 창백해진 얼굴로 온갖 감탄과 애정 섞인 말들을 뒤로한 채, 나는 쓰레기 자루를 들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얼굴을 스치는 차가운 밤바람이
오늘의 피로를 조금은 씻어내 주는 듯했다.
쓰레기를 모아두는 곳은 가게에서 10분쯤 떨어진 골목 안쪽.
익숙한 길을 따라 걷던 중
어렴풋이,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게에서 나올 때부터 따라오더니...'
나는 쓰레기 자루를 조용히 내려놓고
곁에 있던 돌 하나를 슬쩍 집어 들었다.
그때, 술기운에 젖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봐... 너.... 너, 그 검은 머리... 튜베로즈 식당... 그 여자.. 맞지?"
희미하게 풍기는 술 냄새.
불안정한 발소리
그리고 흐린 발음
제정신이 아니라는 건 바로 알 수 있었기에
나는 돌을 더 세게 쥐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오면 다음 날 신문에 나오는 것은 당신일 것이다.
고 생각하며 취객의 발소리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발소리가 거의 뒤에까지 다가왔을 때,
'지금—!'
나는 돌을 쥔 손을 높이 들어 올린 채 뒤를 돌았다.
그런데 모든 것은 내 생각과는 달랐다.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서늘하고, 단정하게 정제된 향으로 바뀌었다.
또, 시선 끝에 보이는 것은
달빛에 반사되어 희미하게 반짝이는 머리카락.
그리고—
내 앞을, 아니 그 남자를 막아선
넓은 등.
"에....에델베인 카멜리아스님??!!!"
그가 방패처럼 내 앞을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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