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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머문 자리

(창작 소설)튜베로즈 식당의 루비아(4)

by Rang랑 2025. 7. 25.

오랜만에 찾아온 휴일.

창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은 금가루처럼 가볍고 따뜻했다. 창틀 위에 내려앉은 먼지마저 반짝거릴 만큼, 오늘은 눈부시게 평화로운 날이었다.

부엌에서는 갓 구운 케이크의 향이 퍼지고 있었다. 달콤한 과일과 부드러운 크림이 어우러진 그 냄새는 천천히 집 안을 감쌌다.

나는 조심스럽게 케이크 위의 장식을 마무리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매번 받기만 하는건 미안하니까..."

 

식탁 위에는 반듯이 접힌 냅킨과 가지런히 놓인 접시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작은 소풍이라도 떠나는 듯한 설렘이 식탁 위에 깃들어 있었다.


 

햇살이 머금은 따스한 방 안.

나는 거울 앞에서 옷장을 뒤적이며 서성이고 있었다.

무난하고, 나를 감춰줄 수 있는 색과 형태의 옷들. 그중 하나를 꺼내 들고 단추를 잠그려던 순간ㅡ 문이 살며시 열렸다.

 

 

"언니, 오늘도 만나?"

 

 

방 안으로 들어선 건 웬디였다.

 

 

"뭐...응.."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단추를 잠갔다.

웬디는 살짝 한숨을 쉬고 조용히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수수하면서도 단정한, 익숙한 흰 옷 한 벌이 들려 있었다.

 

 

"이거 입어"

 

"이걸? 너가 아끼는 옷이잖아"

 

"응. 아끼니까 빌려주는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내가 입고 있던 옷을 벗기고 자신이 가져온 옷을 건넸다. 

웬디의 눈빛은 평소와 다르게 조용하고 깊었다.

나는 잠자코 옷을 받아들고 갈아입었다.

 

 

"...역시 이런 옷은 웬디가 어울리지, 나랑은 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왜? 잘 어울리는데."

 

 

웬디는 내 손을 이끌어 의자에 앉히고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빗어주었다.

달칵ㅡ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예쁜 흰색 리본핀이 내 머리에 달렸다.

 

"어... 이거 저번에 산거 아니야? 한 번도 안 쓴 거 같은데."

 

"상관없어."

 

잠시 침묵이 흐르고,

웬디는 한동돈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살며시 미소를 지은채 내 어깨를 감쌌다.

 

"...예쁘다, 언니. 재미있게 놀다 와."

 

"빌려줘서 고마워."

 

"이거, 사랑이야. 알지?"

 

나는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럼, 고마워 정말"

 

 

웬디는 작게 웃더니, 방문을 나서기 전 마지막 한마디를 남겼다.

 

 

"고마우면, 케이크 한 조각 남기고 가." 

 

 

문이 닫히고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을 때, 나는 거울 속 낯선 내 모습으 다시 바라보았다.

 

 

"...이런, 벌써 시간이"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나는 부리나케 아랫층으로 내려갔다. 케이크를 조심스럽게 자르고, 그중 일부는 바구니에 담았다.

가게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서자, 부드러운 바람이 치맛자락을 스쳤다.

 

정오를 갓 지난 시각.

벤치에 앉아 에델베인님을 기다리던 나는 케이크가 담긴 바구니를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달콤한 향이 퍼지자 괜스레 가슴이 콩닥거렸다.

곧이어 저 멀리 평소와 다름없이 눈부신 모습으로 그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루비아씨"

 

그는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잔잔한 바람에 살며시 흩날렸다.

 

 

"기다리셨나요?"

 

"아니요.. 저도 방금 막 도착했어요."

 

 

설레이는 마음을 감추려, 나는 재빨리 바구니를 내밀었다.

 

 

"이...이거!"

 

 

그는 순간 놀란 듯 눈을 깜빡였지만, 곧  부드럽게 웃으며 바구니를 받았다.

 

 

"무엇인가요?"

 

"아침에 구운 케이크예요.. 매번 선물 받기만 해서...조금 죄송하더라고요."

 

"저를 위해 만들어주신건가요?"

 

 

그는 조심스럽게 바구니를 받아들었다.

 

"정말...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주 잠깐, 그의 눈길이 내 손끝에 머물렀다.

그리고 내 손을 살며시 잡더니 "이쪽입니다" 라고 말하고는 어디론가 나를 이끌었다.

사람들의 소음은 점차 멀어지고, 대신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와 잎사귀 흔들리는 소리만이 귀에 들어왔다.

내 심장소리가 혹시 그에게까지 들리는 건 아닐까, 조심스레 숨을 고르며 걸었다.

 

숲길을 따라 10분쯤 걸었을까.

눈 앞에 갑자기 시야가 탁 트이더니, 보석처럼 반짝이는 커다란 호수가 나타났다.

맑고 투명한 물 위로 햇살이 일렁였고, 부드러운 바람이 수면 위를 간질이며 은은한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우와..."

 

입가에서 무심코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는 잠시 내 반응을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의 비밀 장소입니다. 어릴 적부터 자주 왔었지요. 복잡한 곳에서 벗어나 홀로 생각에 잠기기 좋은 곳입니다"

 

"정말... 아름다워요."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케이크 바구니를 내려놓고, 나와 함께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조각을 꺼내어 나눠주었고, 그는 포크를 들어 케이크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잠시 후, 눈을 살짝 감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맛있습니다."

 

 

짧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칭찬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입맛에 맞는다니 다행이에요."

 

 

그와 나누는 대화는 처음 보았을 때의 어색함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즐거웠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시간을 보내고, 붉은 노을이 수면 위로 퍼질 즈음, 우리는 다시 숲길을 따라 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노을빛이 나뭇잎 사이로 새어 나왔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다시 천천히 우리 곁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머, 카멜리아스 경 아니십니까?"

 

 

맑고 높게 울리는 낯선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기사들과 하녀들 사이에서 화려한 자수를 수놓은 연보랏빛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은빛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고, 손에는 자줏빛 레이스 부채가 들려 있었다. 

 

 

"브라운 공녀님"

 

 

에델베인님은 깔끔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 역시 그의 뒤를 따라 살며시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부채 너머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미묘한 미소를 띄울 뿐이었다.

 

 

"요즘 카멜리아스 경이... 평민 계집과 어울린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사실이었군요."

 

 

그녀의 목소리는 단정하고 고왔다. 하지만 단어 하나하나에는 날 선 독이 감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공녀는 아주 자연스럽게 에델베인님의 곁으로 다가와, 슬쩍 그의 팔 가까이에 손끝을 걸쳤다.

 

 

"경께서 저희 가문 행사에 얼굴을 비추지 않으시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곧 파티가 있을 예정인데 참석해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경의자리가 비면 늘 허전하답니다."

 

 

주변의 시선이 내게 쏠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귀족 여성들 사이에서 에델베인 카멜리아스는 모두가 원하지만 누구도 손에 넣지 못한 존재였다.

그런 그의 곁에, 내가 있다는 사실은 솔직하게 이질적이기는 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부끄럽거나 기분이 상한 것은 아니었다.

 

에델베인 카멜리아스님은 왕국의 빛나는 검이자 백작가의 차남이다. 

그런 그의 곁에, 평민인 내가 있다는 것 자체가 그의 명예에 누를  끼치고 있는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에 가슴이 무겁게 눌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에델베인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브라운 공녀님"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상대에 대한 예의는 지켜주시지요. 저에게 소중한 분입니다."

 

 

그의 말 끝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순간, 그녀의 미소가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여전하시군요."

 

 

그리고는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재미를 보시는 것도 좋지만, 카멜리아스 가문의 품위를 생각하신다면 적당히 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공녀는 부채를 닫으며, 들릴락 말락한 소리로 비웃음을 내뱉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는데 에델베인님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불쾌한 일을 겪게 해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

 

 

서서히 고개를 올려 그를 바라보니 아까의 차가운 표정은 사라져있었다.

그의 눈에는 걱정과 미안함이 가득한채로 조심스럽게 나의 표정을 살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보았다. 

하지만, 무언가 갑갑한 마음에 더 이상 그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품에 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늘 재미있었습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루비아씨!"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한 채, 전속력으로 달렸다.

치맛자락이 바람에 흩날렸고, 어딘가 심장이 아프게 뛰기 시작했다.

 

 

"헉....헉..."

 

 

숨을 고르며 집 안으로 들어서자, 어머니가 가장 먼저 다가왔다. 그 뒤를 이어 가족 모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조금 달렸더니 숨이 차서... 피곤해서 그런데 오늘은 먼저 올라가서 쉴게요."

 

나는 애써 웃어 보이며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가족들의 시선을 피하듯 곧장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등 뒤로 문이 닫히자, 안도와 함께 무거운 침묵이 밀려들었다.

나는 창가에 다가가 앉았다. 커튼 사이로 밤공기가 스며들었다.

 

 

'소중한 분입니다.'

 

 

고마운 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벅찼다. 

그 말이 품고 있는 무게와 의미가, 나라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에델베인님은 내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조금만 더 가까워지면, 그가 딛고 있는 귀족이라는 자리 자체가 불편해지는 것은 아닐까. 

조금만 더 다가가면, 그를 향한 수많은 시선과 목소리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그를 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하늘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아도니아의 거리는 정적에 휩싸였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 한쪽, 옷장이 놓인 쪽으로 향했다.

그 안 깊숙한 곳, 가족들 누구도 모르는 은밀한 장소에서 나는 낡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여는 순간, 촛불 아래 어슴푸레하게 반사된 검은 천과 강철의 차가운 광채가 드러났다.

만원의 모양이 새겨진 검은 복장과 두건, 그리고 검 한자루.

 

나는 안에 있는 옷으로 갈아입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서늘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하늘 높이 떠있는 달을 올려다본 후,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용히 몸을 날렸다.

그리고 빠르게 아도니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작은 약방, 「아사비케시」로 향했다.

 

이곳은 대낮엔  평범한 약방이지만, 밤이 되면 또 다른 이름 「루케오」로 바뀐다.

달의 어둠을 뜻하는 고어.

그 이름에 걸맞게 밤의 그늘 아래, 부당함을 거두는 의적단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모두가 잠든 시간.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조용히 아사비케시의 뒤편으로 돌아가 문을 두드렸다.

단 한번, 짧게.

곧 문이 열리며, 촛불빛이 안에서 흘러나왔다.

 

 

"어서와, 루비아"

 

 

문을 연 이는 붉은 곱슬머리를 한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하비.

낮에는 약사로, 밤에는 루케오의 정보책임자였다.

 

 

"좋은 밤이야 하비"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섰다.

익숙한 향기. 약초와 잉크, 가벼운 가죽 냄새가 뒤섞인 공간을 지나 위층으로 향했다.

세 개의 문이 나란히 놓인 복도.

그중 가장 앞의 문을 열자 다소 어둡지만, 벽을 가득 채운 문서들과 지도, 사진들에 둘러싸인 공간이 나타났다.

커다란 책상 앞에는 다섯 개의 의자가 있었고, 이미 그 중 세 자리에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나는 두건을 벗고 가장 안쪽, 벽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하비도 내 왼편에 자리를 잡았다.

 

 

"대장 좋은 밤이야~"

 

 

능글거리는 미소로 인사를 건 사람의 이름은 아삽. 

긴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그녀는 낮엔 조용한 책방의 주인이지만, 밤엔 루케오의 정보 수집과 문서 정리를 맡고 있다.

내 오른편에는 라코타.

거칠게 묶은 금발 머리와 날렵한 눈매.

그는 무기상인으로 일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장비와 은밀한 경로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의 옆에 보라빛 머리를 넘기고, 눈가에 눌 피로가 묻어 있는 조용한 남자는 케인.

평소에 하비의 조수로 일하고 있고, 은신과 침투에 능한 그림자 같은 존재이다.

 

이들이 바로, 루케오.

 

나는 손가락으로 책상 위의 하나의 문서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시작하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튜벨리즈 식당의 루비아가 아닌 루케오의 루비아로서의 밤이 시작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