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스토리는 3인칭 관찰자 시점입니다.]
"오늘 재미있었습니다.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루비아의 인사는 유난히 조용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급히 몸을 돌려 사라지듯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에델베인은 바라보다가, 마치 놓쳐서는 안 될 무언가가 저만치 사라지는 듯한 불안한 마음에 황급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루비아씨!"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이 점점 멀어질수록, 에델베인의 가슴 한켠은 서늘해졌다.
그날 밤, 에델베인은 기사단 숙소의 개인 방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엔 미처 작성하지 못한 보고서가 쌓여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허공에 머물렀다. 펜을 잡고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하던 그의 머릿속엔 루비아의 마지막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천천히 커튼을 젖혔다. 어둠을 뚫고 흐릿하게 떠오른 달빛이 왕국의 정원을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그는 허리춤에 검을 차고 방을 나섰다.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바람이 스치며 전하는 밤공기는 차가웠고, 수도의 구석구석은 어두운 골목들로 얽혀 있었다. 그때, 그의 시야의 끝에서 뭔가 움직였다. 마치 누군가가 그림자 속에서 숨어 움직이는 듯한 모습.
에델베인은 곧장 몸을 낮췄다.
"..."
최근 수도에서 실종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시기였다.
에델베인은 조심스럽게, 그러나 망설임 없이 그 그림자를 뒤쫓기 시작했다.
'한 명이 아니다... 둘, 아니 셋?'
그림자는 복잡한 골목길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에델베인은 조심스럽게 담벼락 뒤에 몸을 숨긴 채 상황을 살폈다. 그리고 곧, 또 다른 인물이 누군가를 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중 추격.
그는 수상한 움직임의 누군가를 포착했고, 그 뒤를 두건 속에 숨어 움직이는 루비아와 케인이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다만, 에델베인은 아직 두건을 쓴 자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와 동시에, 루비아는 뒤쪽의 인기척을 감지했다. 추적자에게 추적자가 붙은 상황.
이대로라면위험했다.
"뒤는 내가 맡을게. 너는 계속해서 추격해."
루비아는 케인에게 낮게 속삭였고, 케인은 짧게 끄덕인 후 시야 너머로 사라졌다.
그녀는 곧장 허리춤의 검을 뽑아 그림자 쪽을 응시했다.
그림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고, 그 자리에서 경계하는 듯 서 있었다.
검을 든 상대. 에델베인은 이내 자세를 낮추며 대응 태세를 취했다.
"나는 에델베인 카멜리아스다. 두건을 벗고 정체를 밝혀라."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그 순간, 두건 너머에서 작게 들려오는 목소리.
"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에델베인은 순간 검에서 손을 데고 상대의 실루엣을 유심히 살폈다.
'그 목소리... 설마... 루비아?'
그는 다시 정신을 다잡으며 검에 손을 얹었다.
"수도에서 실종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수상한 자는 조사 대상이다. 협조를 부탁한다."
그가 한 걸음 다가가자, 그림자 또한 긴장한 듯 한 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순간, 구름 사이로 달빛이 골목길을 비췄다.
금빛 머리칼과 은빛 검의 윤곽이 선명해졌고, 두건을 쓴 이의 얼굴도 서서히 드러났다.
보랏빛 눈동자. 익숙한 반짝임.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친 루비아는 당황해 하며 혹시나 그가 자신을 알아볼까 빠르게 두건을 고쳐 썼다.
에델베인의 시선은 그녀의 눈에서 손끝, 그리고 몸짓까지 내려갔다.
그 모든 것이 기억 속 루비아의 것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 겁니까? 위험에 처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에델베인은 검에서 손을 떼고, 한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해지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저는 단지 수도의 질서를 지키는 자일 뿐입니다."
그 순간, 루비아의 마음은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말을 하면 그는 날 알아볼 거야. 하지만... 도망쳐도 그에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아도니아 왕국의 최강이라 불리는 자였다. 싸워서 이길 수는 없고,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두 사람 사이에 숨소리조차 삼켜지는 듯한 침묵이 흘렀다.
루비아는 여전히 두건을 벗지 않은 채,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그 몸짓 안에 수많은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ㅡ도망칠 수 있을까?
ㅡ그를 속일 수 있을까?
ㅡ나를 알아본건 아니겠지?
심장은 무서울 정도로 요동쳤고, 손에 쥔 검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녀 앞에서 몇 걸음 남짓 떨어진 에델베인은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전에 날카로운 기색은 온대간데없이, 지금 그의 눈동자에는 의문과 걱정이 서려 있었다.
루비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운 검보다 더 아프게 마음을 찔러왔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심장이 무너지듯 내려앉은 느낌. 그 순간, 그녀는 결단을 내렸다.
검에 살짝 힘을 빼고, 조용히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마치 협조하겠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건, 맹수의 눈앞에서 마지막으로 뛸 타이밍을 재는 사냥감의 움직임이었다
순간적으로, 그녀는 빠르게 검을 들어 그에게 달려들었다.
에델베인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는 정면으로 덤비지 않고 날렵하게 측면으로 몸을 비틀며 순간의 틈을 파고들어 그를 피해 골목을 빠져나갔다.
"멈추십시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숨을 죽이며 달렸고, 에델베인은 망설임 없이 그 뒤를 쫓았다.
긴 다리를 이용해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는 에델베인.
그는 벽과 장애물을 능숙하게 넘으며 그녀의 등 뒤를 쫓았다.
에델베인은 눈 앞의 수상한 자의 뒷모습이 자꾸만 낯익게 느껴졌다.
옷자락이 날리는 각도, 달릴 때의 자세, 걸음걸이, 숨소리ㅡ
에델베인은 자신도 모르게 손끝에 감정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은 단지 수상한 자를 쫓는 것이 아니었다.
그 실루엣에 숨겨진 한 사람을 찾아내려는 간절함이었다.
그 순간, 루비아의 머릿속에도 수많은 계산이 번뜩였다.
'저 거리, 저 속도... 곧 잡힌다. 이대로는 안 돼.'
싸우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는 길.
그는 날 죽이지는 않을 거야. 확신은 아니지만... 믿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결정했다.
측면의 나무을 이용해 방향을 틀고, 에델베인의 시야 바깥으로 곡선처럼 빠져나갔다.
하지만, 두번은 당하지 않는 법인가.
에델베인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몸을 틀어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 손끝이 두건 자락을 스치고, 천이 흔들렸다.
'이런...!'
루비아는 반사적으로 두건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ㅡ
발밑에 숨겨진, 미처 보지 못한 나무 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윽!"
그녀는 앞으로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 모습에 에델베인은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당신이 누구든, 왜 도망치는지 말해주십시오. 위험에 처해 있다면 제가 당신을 보호하겠습니다."
에델베인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젠장... 나도 빠른 편인데...'
루비아는 넘어진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순간, 에델베인이 두건을 잡았던 손길이 남긴 흔적으로 인해, 두건이 제 힘을 잃고 있었고, 루비아가 다급히 두건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천천히, 무거운 듯ㅡ
두건은 힘없이 땅 위로 떨어졌다.
차가운 달빛이 그녀의 얼굴 위에 쏟아졌다.
바람이 살며시 불어와, 검은 곱슬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사이로 보랏빛 자수정처럼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루...비아씨?"
에델베인의 마음은 의문과 혼란으로 뒤엉켰다. 살며시 보이는 저 옷의 문양은 왕국에서도 주시하고 있는 비밀 단체 [루케오]의 문양을 달고,
왜
지금 그녀가 그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있는지ㅡ
그가 당황한 얼굴로 한 발짝 물러섰다.
루비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걱정과 혼란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고 그녀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 숨길 수는 없겠네...'
루비아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에델베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에델베인님.
이 시간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검을 천천히 집어넣었다.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
그저... 에델베인님이 알고 있는,
평범한 식당의 딸,
평범하기 짝이없는 평민의 '루비아'로써 모른채하고 저를 보내주실 수 없을까요?"
에델베인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옅은 금발 머리칼이 부드러운 밤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제가 알던 루비아씨로서는,
당신을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에델베인은 조심스럽게 루비아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그 문양... [루케오] 맞습니까?
불의를 바로잡고, 약자들을 돕는다고... 알려진 단체...
당국에서 그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혹시 연루되신 건가요?"
에델베인의 얼굴은 놀라움과 걱정, 그리고 기사로서의 책임감과 이해하려는 마음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 복잡한 감정은 루비아도 마찬가지였다.
'루케오'는 왕국에서 이미 위험한 이름이었다.
우리와 주변의 안전을 위해,
우리의 존재를 알게 된 자, 얼굴을 본 자는 누구든,
특히 왕국과 관련된 자라면 반드시 처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에델베인의 푸른 눈동자와, 그가 쫓아오느라 이마에 맻힌 땀방울을 보며,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정적 속에서 심장이 요동쳤다.
그의 손이 닿았던 감촉이 아직도 귓가를 간질였고,
그가 건넸던 말들이 가슴 깊은 곳을 파고들었다.
'... 이 사람은 내가 아는 에델베인님이라면...'
그를 속일 수도, 그의 검 앞에 무릎 꿇을 수도 없는 자신이 있었다. 아니, 루케오의 리더로서가 아닌 루비아라는 이름으로, 그의 눈동자 안에서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결심한 듯,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그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제 이름은 루비아, 비밀단체 [루케오]의 리더입니다.
저의 명령 아래, 루케오는 귀족들을 포함한,
물의를 일으킨 자들을 공격해왔습니다."
그는 시선을 마주한채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루비아를 피해 한 걸음씩 물러섰지만, 이내 나무에 가로막혀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루비아는 그런 에델베인의 바로 코 앞까지 다가갔다. 그리고 조용히 루비아는 그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훑었다.
"저를 잡아가실 건가요?"
그리고 그를 향해 살며시 미소 지었다.
"에델베인 카멜리아스님?"
그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등을 스치는 순간, 몸이 굳었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에델베인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자신의 손가락을 움직여 루비아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잡혀주실 겁니까?"
에델베인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손끝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깊고 깊은 혼란과... 어쩌면 애틋함 같은 감정이 스며 있었다.
둘 사이를 흐르는 바람이 조용히 지나가고,
검은 곱슬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의 뺨을 스쳤다.
에델베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쉽게 보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을 놓지 않을 채, 지긋이 루비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루비아는 처음으로 자신의 진짜 모습으로, 누군가에게 발견된 기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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