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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머문 자리

(창작 소설)튜베로즈 식당의 루비아(3)

by Rang랑 2025. 7. 16.

달빛이 조용히 내려앉은 거리.

식당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그곳에는 나와 카멜리아스님, 단 두사람만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엔 내가 건넨 들꽃 한 송이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깊은 숨을 들이쉰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어슴푸레 스며들어 있었다.


 

"그동안의 제 행동에 대해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제 행동이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 줄은 몰랐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입술을 다물었다.

이 조용한 밤의 공기처럼, 내 마음도 고요했지만 어디선가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루비아씨를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눈길이 갔습니다."

 

 

그는 잠시 시선을 내렸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달빛을 머금은 그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항상 열심히 하시는 모습, 가끔 지어 보이던 미소가... 아름다웠습니다."

 

 

긴장감이 감도는 거리.

그의 금발은 달빛에 은은히 빛났고, 넓은 어깨와 단정한 실루엣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그가 말을 이어갈 때마다 주위의 모든 소리가 멈춘 듯,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이 우리의 공간을 채웠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당황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직접 대화를 나눈 적 없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말씀 감사합니다.. 좋게 봐주신 것도."

 

 

나는 작게 숨을 고르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늘이 처음 이야기 나눈 날이고, 또... 카멜리아스님은 백작가의 차남이시잖아요. 그런 분이 평민이 저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신다는 게... 조금 믿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당황스럽네요."

 

 

그는 미소 짓지도 않고, 그렇가도 어둡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대화한 건 맞습니다. 저 역시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을 뿐, 말을 걸 용기를 내지 못했으니까요."

 

 

그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달빛 아래 그의 옆모습은 또렷했고, 고요한 밤 속에서 더 깊게 각인되었다.

 

 

"귀족과 평민, 그 차이를 저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카멜리아스'가 아니라, '에델베인'이라는 한 사람으로서 당신과 마주하고 싶습니다."

 

 

그의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마음을 열 수 없었다.

귀족들의 호기심 섞인 관심은 평민들에게 상처를 남기곤 했다. 나 또한 그런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으니까.

 

그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나의 침묵에 그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카멜리아스님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나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제가 바라는 건, 단지 당신을 알아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서두르고 싶지 않아요."

 

 

그의 말은 내 마음에 잔잔하게 번졌다.

솔직히 그의 태도는, 진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몇 번 만나다 보면 금방 흥미를 잃겠지.'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알겠어요.. 그럼...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요, 우리."

 

 

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곧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카멜리아스 가문의 차남도, 왕국의 기사도 아닌, 그저 '에델베인'으로서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미소는 작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며 반짝였다. 보는 것만으로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나를 향해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루비아씨?"

 

"헉!... 아,아뇨. 그게... 크흠... 그..

 

그렇게까지 감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정말 감사한걸요."

 

 

위험한 남자다.

나는 그의 미소에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그럼... 카멜리아스님"

 

"에델베인"

 

"네?"

 

"에델베인으로 불러주세요."

 

"아...네.. 에, 에델베인님"

 

"네, 루비아씨."

 

 

이 남자가 이렇게 자주 웃는 사람이었나?

또 다시 멍하게 있던 나를 향해 다시 말이 건네졌다.

 

 

"루비아씨만 괜찮다면.. 쉬는 날을 알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그 시간에 맞춰 찾아뵙고 싶습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귀 끝이 붉어진 듯했다. 

 

"음... 이번주는 오후 6시쯤부터 괜찮을 것 같아요."

 

"오후 6시. 기억하겠습니다.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찾아뵙겠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슬슬 돌아가죠.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그와 가게로 돌아가는 동안 특별하게 말을 한 것은 없다. 

우리들 주변으로 밤바람이 살며시 불어와 나뭇잎들을 흔들었고, 그 소리가 이 정적을 대신해주었다.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조용히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그림자가 나를 감쌌다.

그는 오늘 밤, 평소의 차가운 얼굴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루비아씨, 오늘 짧지만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다음에 만날 땐, 더 많은 걸 나누고 싶어요. 제 이야기도, 당신의 이야기도"

 

 

그는 한순간 머뭇거렸지만, 조용히 덧붙였다.

 

 

"혹시... 내일도 뵐 수 있을까요? 부담되신다면 거절하셔도 괜찮습니다."

 

 

그의 말에 숨이 걸렸다. 

어색함과 함께 가슴 한편이 간질거리는게 이상한 기분이다.

 

 

"네... 에.....에,에델베인님.."

 

 

겨우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왜 이리 당황스러운 건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급히 가게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일 봬요.'

 

 

말을 끝내자마자 얼른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청소 중이던 웬디와 눈이 마주쳤다.

 

 

"언니!! 갑자기 어디 간 거야!! 놀랐잖아!!!"

 

"미안해.. 많이 바빴어?"

 

"아니 그건 아닌데, 갑자기 뛰쳐나가서 다들 깜짝 놀랐어."

 

"미안해. 급하게 생각난 일이 있어서.."

 

 

나는 웬디가 들고 있던 빗자루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내가 마무리 할게. 너는 올라가서 좀 쉬어."

 

 

거정하는 그녀를 등 떠밀어 계단 쪽으로 보냈다.

처음엔 버티던 그녀도 "빨리 올라와."라고 말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가게 위층은 우리 가족이 지내는 공간이었다.

서둘러 마무리한 뒤, 나는 2층 복도 끝에 있는 내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은은한 달빛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침대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겉으로는 고요했지만, 내 심장은 여전히 소란스러웠다.

______________________

 

다음 날 아침, 유난히 정신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잠든 나를 깨운 웬디의 손길에 정신을 차리고 부리나케 싯은 후, 곧장 가게 일을 도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하루가 흘러 어느덧 오후 6시가 가까워졌다.

그제야, 어제 그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설마 진짜 올까 싶던 찰나, 가게 문이 열렸다.

 

그였다.

 

식당 안을 천천히 둘러보더 시선이 내 쪽을 향했다.

구석에서 숨을 고르고 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

그리고는 갑작스레 내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었다.

 

작은 꽃다발이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들꽃 몇 송이가 정성스레 묶여 있었다.

 

 

"식사는 하셨나요? 괜찮으시다면... 같이 식사하러 가실래요?"

 

 

그는 어제보다 훨씬 여유로운 분위기였다.

금발 머리는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정리되어 있었고, 제복 대신 단정한 평상복을 입은 모습은 그 어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보다도 더 눈에 띄었다.

그래...

말 그대로 '빛이 난다'이다.

나는 멍하니 꽃을 바라보다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주변의 시선이 느껴지니 정신이 드는 기분이 들었다.

 

 

"꽃...꽃 감사해요!"

 

 

식당 안은 갑작스레 조용해졌다.

가족들, 손님들 모두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국의 빛나는 검', 카멜리아스 가문의 차남이...

평민인 내게 꽃을 전해주는 이 상황은, 모두에게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단 한 사람ㅡ 그를 제외하고.

 

 

"이...일단 나가요!!"

 

 

나는 그를 끌 듯이 그의 손목을 잡고 식당 밖으로 향했다.

나보다 한참 큰 키에 덩치도 컸지만, 그는 순순히 따라 나왔다.

밖에 나오자, 얼굴이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손에 들려 있던 꽃다발을 보자 심장이 간질거리는 기분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꽃, 정말 예쁘네요."

 

 

그러다 문득ㅡ 아직 그의 손을 잡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황급히 손을 놓으며 말도 안 되는 해명을 덧붙였다.

 

 

"죄,죄송해요!! 그게... 꽃이 예뻐서, 아니 그게 아니라... 죄송해요 갑자기 건드려서..."

 

 

내가 손을 놓자 순간 그의 표정이 살짝 흔들리는 듯했지만, 곧 평소의 침착한 얼굴로 돌아왔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는 내 당황스런 모습을 보며 잔잔히 웃었다.

 

 

"꽃이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조금 한적한 골목을 가리켰다. 햇살 아래 반짝이는 그의 금발이 밤에 볼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잠시 산책할까요? 날씨가 좋아서요. 안에만 있기엔 아깝잖아요."

 

 

그의 발걸음을 따라 조용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햇살 아래, 우리 둘의 그림자가 나란히 길게 늘어졌다. 

손에 들린 꽃다발이 산들바람에 살랑거렸고, 그의 푸른 눈동자는 햇빛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우리는 천천히, 그리고 내 예상보다 편한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변의 작은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고, 또 이야기를 이어가다 시간이 늦기 전에 식당으로 돌아왔다.

 

그 후에도 그는 날마다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어떤 날은 평상복, 어떤 날은 제복 차림이었다.

매번 다른 모습이었지만, 언제나 같은 미소로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이 관계가 금방 끝날 줄 알았다.

귀족의 잠깐 스친 호의, 혹은 호기심 어린 장난.

그저 그런 이야기로 끝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가 전해준 따뜻한 말들,

매일 건네받은 작은 꽃다발들.

그 모든 것이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무게로 내 마음에 쌓여갔다.

그래도 나는 생각했다.

이건 그냥ㅡ

평민 루비아와, 왕국의 기사 에델베인의

잠시 스쳐 지나가는 짧은  이야기라고.

정말, 그럴 줄 알았다.

...

 

 

"루비아....씨?"

 

 

어두운 골목길.

가쁜 숨소리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빛에 비친 얼굴.

두건 아래로 흘러내린 보랏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반짝인다.

긴장감이 감도는 이 낯선 공기 속에서

나는 숨을 죽이고 서 있었다.

 

우리가 정말 이렇게 엮이게 될 줄은...

그때의 나는, 정말로

상상조차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