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달빛만이 우리를 비추는 깊은 밤.
에델베인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그저 조용히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루비아씨..."
그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진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전하는 따뜻함과 달리, 루비아의 손끝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에델베인은 한참을 바라보다가, 이내 손을 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농담이었습니다. 루비아씨를 잡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건 진심입니다. 도움이 된다면 돕고 싶다는 것도요."
그는 한 걸음 물러나며 뒷목을 쓸어내렸다.
"...믿어주세요."
루비아는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이 사람을 믿어도 괜찮은 걸까?
왕국의 도움이 있다면 분명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도 뒤따른다.
에델베인은 더 말하지 않고 기다렸다.
고요한 밤공기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잠시 후, 마침내 루비아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시간을 조금 주시겠습니까? 저 혼자 결정할 수는 없어서요."
"이해합니다."
루비아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가 휘파람을 불었다. 맑은 소리가 바람을 타고 어둠 속으로 멀리 퍼져나갔다.
곧, 하늘에서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내려왔다
"좋은 밤이야, 데릴"
그것은 까마귀와 닮았지만, 독수리만큼 거대한 신비로운 존재였다.
날개를 접고 다가오는 모습에 에델베인은 눈을 크게 떴다.
루비아는 데릴의 깃털을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데릴입니다. 편지는 이 아이를 통해 전달하죠."
"알겠습니다. 저는 왕궁 기사단 숙소에서 지냅니다. 언제든 올 수 있게 창문을 열어두겠습니다."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만"
짧게 대답한 그녀는 빠르게 몸을 돌렸다.
에델베인은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천천히 왕궁으로 향했다.
루케오의 본거지로 돌아온 루비아를 향해 모두가 동시에 다가왔다.
"괜찮습니까? 다친 곳은요??"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지자, 루비아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잠시 뒤 회의실. 루비아는 차분히 방금 있었던 일을 전했다.
"저는 왕국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단순한 실종 사건이 아니니까요."
그녀는 모두를 둘러보며 단호히 말했다.
"10년 전 그 실험이... 다시 시작되었으니까..."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적을 깨고 하비가 입을 열었다.
"나도 동의해. 이 일이 그 실험과 연결된 이상 우리끼리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다만, 우리의 안전과 비밀도 중요해."
라코타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루비아씨께서 신뢰하는 분이라면 저도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신용할 수는 없습니다."
루비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만약 그가 약속을 어기고 위험을 불러온다면...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그녀의 단호한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시는 케인에게 부탁합니다. 들키지 않도록 일주일 동안 관찰한 후 보고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케인이 짧게 대답했다.
그날 이후, 루비아와 루케오의 모두는 매일 밤 모여 케인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에델베인의 하루는 놀라울 정도로 규칙적이었다.
해 뜨면 개인 훈련, 오전엔 업무, 오후에는 부하들의 훈련 지도, 저녁에는 다시 업무.
그러나 케인은 두 가지 수상한 점을 짚었다.
"첫째, 매일 같은 시간에 튜베로즈 식당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나오더군요.
둘째, 이 추운 날씨에 창문을 열어두고 잡니다. 틈만 나면 창문 쪽을 바라보길래 처음에는 들킨 줄 알았습니다만, 그건 아니었습니다."
방 안의 긴장감이 더해졌다.
"혹시 대장을 감시하려고??"
"그렇기엔 곧장 왕국으로 돌아가 업무하던데요."
"맞아요, 저와 라코타도 루비아씨가 걱정되어서 가게는 직원에게 맡기고 루비아씨 주변을 지키고 있었는데 수상한 자는 없었습니다."
웅성거림이 이어지자, 하비가 단정 짓듯 말했다.
"루비아를 보려고 한 거겠지."
그 한 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루비아에게 쏠렸다.
루비아의 얼굴은 금세 붉어지고, 땀방울이 맺혔다.
며칠 동안 루비아는 일부러 식당을 비우고 밖에서 정보를 수집하며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조사를 마치고 식당에 돌아오면 여동생 웬디가 들러붙으며 말했다
"언니! 에델베인님이 또 왔어. 싸운거야? 그분이 언니 상처줬어?"
"아니야, 그런 거..."
피하고는 있었지만, 문득 수도에서 그의 뒷모습을 보게 되면 가슴이 흔들렸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그럴 때마다 그녀는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비 말이 맞아요. 원래 자주 식당에 찾아오셨으니까 평소처럼 오신 것 뿐이고, 창문은... 내가 모두와 이야기한 후 데릴을 통해 편지를 보내겠다고 말했거든요. 그건 그렇고 케인에게 감시를 맡기기는 했지만 그를 지켜본 것은 케인 뿐만이 아닐 겁니다. 맞죠?"
그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해요.. 다들,, 그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잠시 고민이 흘렀다. 가장 먼저 라코타가 입을 열었다.
"난 대장의 판단을 믿어. 사람을 풀어서 조사했지만, 놀라울 만큼 깨끗하더라.'
하비를 비롯한 모두가 차례차례 동의했고, 결국 회의는 결론에 다다랐다.
루비아는 안도한 듯 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늘 밤, 그에게 연락하겠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와 만나서 하죠. 물론, 얼굴을 드러낸 건 저 한명이니 여러분은 각자의 가면을 착용하세요. 또, 루케오에 초대하는 것은 위험하니.."
"아니, 그냥 여기로 해."
하비가 가로막고 말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알리는 것은 위험해."
"어디서든 위험은 마찬가지야. 차라리 우리가 감시할 수 있는 이곳이 더 낫지."
루비아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대로 바로 전달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오늘은 해산하였다.
이후 창문을 통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루비아는 창문을 열고 책상에 앉아 종이를 꺼냈다.
저희는 기사단과의 협력을 원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선, 에델베인님과의 대화를 하고 싶습니다.
괜찮으신 시간에 루케오로 초대드리고 싶습니다.
데릴을 통해 답장 부탁드립니다.
쪽지를 접어 창가에 앉은 데릴에게 건네었다.
"데릴, 주무실지도 모르니 조용히 창문에 두고 와줘."
데릴은 살며시 쪽지를 입에 물더니 밤하늘을 향해 힘차게 날아올랐다.
나는 데릴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땀에 젖은 옷을 벗고 조용히 욕실로 향했다.
그렇게 샤워를 마치고 돌아오니 데릴이 이미 돌아와 있었다.
데릴의 다리에는 쪽지가 묶여져 있었다.
"벌써...?"
연락 기다렸습니다.
루비아씨와 협력을 할 수 있어 기쁩니다.
저는 저녁 7시부터 괜찮습니다.
저녁 9시에 아도니아의 중심부에 있는 아사비케시로 와주시길 바랍니다.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 편지를 마지막으로 보낸 뒤 루비아는 침대에 몸을 눕혔다.
그 시각, 에델베인은 그녀의 글을 읽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일주일 만에 닿은 연락이 반가웠으나, 차가워진 문장에 씁쓸함이 스쳤다.
복잡한 감정을 안은 채 그는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저녁, 에델베인은 편안한 복장을 걸치고 거리를 나섰다.
차가운 밤공기가 스치고, 적막한 길 위에는 몇 사람만이 스쳐 지나갔다. 그 시선 끝에, 아사비케시 가게 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얇디얇은 옷차림의 그녀. 순간, 그의 발걸음은 저도 모르게 빨라졌다.
다가온 그는 묵묵히 자신의 자켓을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며 낮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루비아씨."
갑작스럽게 나는 그의 익숙한 향기가 스며들자 루비아는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얼굴에 붉은 기가 번지며, 그날 이후 처음으로 마주한 그의 눈빛 앞에서 잠시 시선을 피했다.
"오랜만이에요. 에델베인님.... 반갑지만, 인사는 나중에...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에델베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켓을 돌려주려는 손길을 그는 손사래로 막으며, 한 발 앞서 걷는 그녀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건물 뒤편,
나무문 앞에는 붉은 곱슬머리의 남자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좋은 밤이야. 루비아."
"하.....!
비...... 가면은???"
가면을 착용하기로 한 약속과는 다르게 맨 얼굴로 서 있는 그에게 루비아는 황급히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그러나 하비는 그녀의 불안한 시선을 뒤로한 채, 묵묵히 그녀의 뒤에 선 에델베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이유가 있으니까."
문을 열어젖히며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어서오세요. 루케오에."
어둑한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루비아는 작은 목소리로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하비는 태연히 무시한 채 그를 회의실 문 앞까지 이끌었다.
문틈 사이로 스쳐 보이는 실내 풍경에 루비아는 화들짝 놀라 문을 닫았다.
에델베인을 바라본 그녀는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기고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분명 가면을 쓴 채 맞이하기로 했던 모두가, 일상 그대로의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에델베인님이 바로 앞까지 오셨습니다. 어서 가면을..."
"우리는 가면을 쓰고 만나지 않을 거야. 대장"
"뭐?"
"우리는 루케오입니다. 루비아씨만 위험 속에 둘 수는 없죠."
"물론, 왕국의 다른 자들과 마주칠 때는 가면을 쓸거예요."
의아함과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루비아를 향해, 하비가 어깨에 팔을 올리며 낮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 사람, 안으로 들여보내. 초대해놓고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거야?"
루비아는 모두의 단호한 눈빛과 미소에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촛불의 빛에 물든 그녀의 모습이 문틈 사이로 드러났다.
그 너머로, 에델베인은 그녀의 뒤에 서있는 네 명의 인물들을 보았다.
이들이 루케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긴장 속에, 그러나 분명한 발걸음이었다.
이날의 만남은 훗날, 루비아의 이름 아래 '광휘의 수호자'라 불리며 왕국 최고의 조직으로 거듭나, 그림자 속을 벗어나 아도니아의 환호를 받게 될 또 다른 운명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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