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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머문 자리

사건의 시작: 천고마비의 계절(1)

by Rang랑 2025. 9. 13.

"언니!!"

"으악!!"


빗자루를 턱에 괴고 벽에 기대어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던 루비아는, 갑자기 들려온 웬디의 외침에 화들짝 놀라 중심을 잃고는 빗자루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언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멍 때려? 에드거 오빠가 아까부터 부르고 있어."

그 말에 주방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잔뜩 풀이 죽은 표정으로 굳어 있는 에드거가 보였다. 

"아, 미안... 오늘 좀 피곤한가 봐."

"하비 오빠 가게가 요즘 많이 바쁜가 보네?"

"어... 뭐,그렇지."

루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요즘 가게 일과 최근 일어난 사건의 일로 매일같이 분주했다. 게다가 오늘은, 오늘 꿈인지 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에 살며시 느껴진 그의 손길이 계속 마음속에 맴돌아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루...루비아 누나..."

주방에서 더 슬퍼진 얼굴로 부르는 에드거를 향해 짧게 웃어 보인 루비아는, 발걸음을 옮겨 주방으로 향했다. 그를 따라 주방 일을 도와주다 보니 부모님이 장을 보고 돌아왔고, 평소처럼 가게 문을 열고 손님들을 맞았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 익숙한 인물이 가게 안을 들어왔다.

"루비아."

하비였다.

그는 가족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아 식사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자 루비아가 직접 그의 테이블로 가져갔고, 하비는 그녀를 향해 살짝 미소 지으며 말을 건넸다. 

"이번에 아삽이 새로운 책들을 발견했는데, 양이 너무 많다고 하더군."

"그래? 그럼 좀 도와줘야겠다."

"둘이 하기엔 좀 귀찮을 것 같았는데, 루비아가 함께라면 든든하지."

"언제 가면 돼?"

"오늘 저녁에 괜찮나?"

"응. 일찍 끝내고 갈게."

"좋아. 아사비케시에서 보자."

"응. 식사 맛있게 해."

짧은 대화를 나눈 뒤, 루비아는 다시 가게 일을 도우러 갔다. 식사를 마친 하비는 떠나기 전 그녀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고 조용히 가게를 나섰다. 조금 한가해진 틈을 타 루비아는 부모님께 다가가 말했다.

"오늘 저녁에 아삽을 도와주러 가야할 것 같아요. 그리고... 당분간은 가게 일은 도와드리기 어려울 것 같아요."

부모님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루비아의 머리를 쓰다듦었다.

"그래. 이쪽은 걱정하지 말고 루비아가 해야 할 일을 하렴."

따뜻한 손길에 얼굴이 달아오른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 어느 새 저녁식사를 하러 온 손님들로 가게는 시끌벅적해졌고, 루비아는 자신의 방에서 쉬고 있는 데릴에게 쪽지를 건낸 후 가게의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선선한 바람이 그녀를 스쳐 갔다. 환하게 빛나는 거리를 조용히 바라보던 루비아는 아사비케시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편, 에델베인은 저녁 훈련을 마치고 땀을 닦고 있었다. 
물을 마시기 위해 시선을 돌리니 나무 위에 앉아있는 익숙한 검은 새가 눈에 들어왔다. 

"데릴?"

데릴의 입에는 쪽지가 물려 있었다. 에델베인은 다른 기사들이 눈치채지 않게 조용히 훈련장을 빠져나와 그를 불렀다. 

"안녕, 데릴."

데릴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천천히 그를 향해 내려왔다. 그리고 그의 손 위로 작은 쪽지 하나를 올려두었다. 에델베인은 혹시 몰라 가지고 있던 육포를 작은 주머니에서 꺼낸 후 데릴의 부리에 쥐여주었다. 데릴은 기뻐하듯이 소리를 내더니 육포를 입에 물은 채 그의 머리 위로 올라 앉았다. 에델베인은 묵직한 무게가 머리 위로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쪽지를 열었다.  

에델베인님, 좋은 저녁입니다.  
아침에 실례를 범해 죄송했습니다. 
편히 주무시지 못했을까 걱정이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아삽에게서 새로운 정보를 얻었습니다. 사건과 관련된 자들이 모인 장소를 발견했다고 하더군요. 
오늘 저녁에 그곳을 찾을 예정입니다. 
새로운 소식이 생기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루비아


에델베인은 데릴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종이와 펜을 꺼낸 그는 한동안 망설이다 곧 글씨를 써내려갔다. 쪽지를 접으며 한숨을 내쉰 그의 얼굴에는 걱정이 서려 있었다.

"데릴, 이걸 루비아씨께 전해주렴."

어느 새 창가에 앉아있는 데릴의 발에 쪽지를 조심스럽게 묶으며 속삭였다. 데릴은 알아들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날개를 퍼덕여 창밖으로 날아올랐다. 

"조심해야 할 텐데..."

그의 시선이 창가 너머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데릴을 따라갔다. 그때 방 안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울렸다.

"에델. 저녁 식사 시간이야."

문을 열자 남색에 가까운 긴 머리의 남성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로비아스."

"훈련장에서 바로 가려고 했는데, 언제 빠져나온 거야? 보아하니 씻으려던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럴 일이 있었어. 가자, 배고프다."

에델베인은 창가를 다시 한번 바라본 후, 문을 닫고 동료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그 시간, 루비아는 루케오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그 순간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데릴이 앉아 있었다. 

"수고했어."

짧게 미소 지은 그녀는 육포를 꺼내 그의 부리에 물려주었다. 그러다 발에 묶인 쪽지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풀어 펼쳤다.


루비아씨, 조심하세요. 
어딘지 알려주시면 저도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짧고 단정한 필체는 그와 똑같았다. 순간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해, 루비아는 피식 웃으며 종이를 다시 꺼내 답을 적었다. 


에델베인님
수도와 가장 가까운 숲입니다만, 깊은 곳에 숨어 있어 정확한 위치를 알려드리기에는 어렵습니다. 
혼자 가는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좋은 소식 가지고 오겠습니다.

루비아


종이를 접어 데릴의 발에 매달며 속삭였다.

"부탁해."

데릴은 다시 날아올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루비아는 검을 허리에 매고 계단을 내려가 아지트의 뒷문으로 향했다. 이미 그곳에는 케인을 제외한 모든 루케오가 모여 있었다. 얼굴을 전부 가리는 가면들ㅡ 하비는 부엉이, 아삽은 까마귀, 라코타는 재규어의 형상이었다.


"최대한 다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케인은 이미 그곳에 향해 그들의 동선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니 조심히 그와 합류합시다."

그녀의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평소엔 답답해서 잘 쓰지 않던 백호 형상의 가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가 숲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감쌌다.
깊은 숲 속,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외진 곳에 작은 집이 앞에 이르자 박쥐 형상의 가면을 쓴 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짧게 말했다. 

"아직 수상한 움직임은 없어요."

그들은 조용히 숨어 기다렸다. 잠시 후 어둠을 가르고 무리 하나가 다가왔고, 그 뒤로는  눈과 입이 가려진 채 끌려가는 한 젊은 남성이 있었다.
루비아의 손짓에 모두가 동시에 검집에 손을 올렸다. 순간의 침묵 뒤, 그림자처럼 움직여 적들을 제압했다. 저항할 틈도 없이 쓰러진 무리 중 마지막 남자는 공포에 질려 칼을 들고도 떨고 있을 뿐이었다. 케인이 그의 뒤를 빠르게 잡아 기절시키자, 아삽은 납치된 청년의 밧줄을 풀어주었다. 


"아삽은 저 남성을 치료소로, 케인은 저 자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 정보를 캐세요."

명령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사라졌다. 남은 이들은 집을 조사하기로 했다. 문을 열자 피 냄새와 그 사이로 살며시 느껴지는 소름끼치게 단 꽃향기가 그들의 코 끝을 스쳤다. 
집안을 둘러보자 식탁 아래 바닥에 문이 하나 더 있었고, 그것을 열자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조심스레 내려가자 넓은 지하 공간, 여러 개의 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각자 흩어져 탐색하기로 했고, 루비아는 가장 안쪽의 문을 열었다. 녹슨 손잡이를 돌리자, 희미한 촛불 사이로 심각한 악취와 함께 여러 개의 철창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윽..."


그 안에는 미라처럼 몸이 비쩍 마른 시신들로 가득했다.
천천히 안을 둘러보던 그녀의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이런...!"

칼날이 날아들었다. 본능적으로 검을 꺼내들었지만, 어딘가 익숙한 달콤한 꽃 냄새가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 사이 칼날은 점점 그녀를 향해 내려왔다.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한 루비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는 순간, 날카로운 쇳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하지만 아픔은 없었다.
눈을 뜬 루비아 앞에는 익숙한 실루엣이 서 있었다.

"에...에델베인님?!"

그는 짧게 말했다.

"위험하니 뒤로 물러서세."

검을 들고 있던 자를 단번에 제압하는 에델베인. 뒤이어 하비와 라코타가 달려와 상황을 확인했다. 루비아의 무사함에 안도한 하비는 그녀에게 먼저 밖에서 기다리라 말했다. 하비는 그녀의 상태를 바로 파악했는지, 먼저 밖에 나가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루비아는 그런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지하를 빠져 나와 에델베인과 함께 밖으로 향했다.

선선한 공기가 들어오자 정신이 다시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 새 높게 달이 떠올라 있었다.
그런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에델베인은 향해 루비아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닙니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루비아는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동자가 달빛 아래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살며시 미소를 짓더니 자신의 망토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망토가 바람에 나부끼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그때, 그의 쇄골 쪽에 묻은 붉은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루비아는 그것이 자신을 대신해 검을 막다 생긴 상처라고 확신했다.

"상처가!! 잠깐 벗어봐요!! 다치신 거 맞죠?"

루비아는 다급히 그의 옷 위에 손을 올렸다. 제복을 벗기려 했지만 생각보다 복잡해 손이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에델베인은 그녀의 손길에 잠시 굳어 있더니, 곧 부드럽게 손을 잡았다.

"다치지 않았습니다. 아까 처리하다가 피가 튀었나 봅니다."

그의 말에 안도한 루비아는 본능적으로 그를 꽉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에델베인은 놀란 듯 굳었지만, 곧 천천히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그 온기에 부끄러움이 몰려온 루비아는 황급히 몸을 떼었다.

"그...그런데 에델베인님이 어떻게 여기에?"

토마토처럼 얼굴이 붉어진 그녀를 보며, 에델베인의 귀 또한 붉게 물들었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대답했다.

"데릴의 쪽지를 받자마자 따라왔습니다. 데릴은 루비아 씨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수 있는 아이니까요. 함께라면 당신이 있는 곳에 닿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와 대화를 하고 있자 조사를 끝낸 하비와 라코타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마침, 조사를 마친 하비와 라코타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조사는 끝났어. 남은 건 잡아온 놈한테서 캐내는 것뿐이야."

하비가 먼지를 털어내며 말했다.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지금쯤 케인이 심문을 시작했을 거야. 루케오로 돌아가 합류하자."

그리고는 다시 에델베인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곳의 관계자는 루케오로 끌고 갔습니다. 방금 납치된 듯한 남성은 아도니아 수도의 치료소로 보냈습니다. 아마 내일 아침이면 그의 진술을 들을 수 있을 겁니다."

에델베인은 그녀의 말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습니다. 혹시 괜찮다면, 저도 루케오로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상황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물론입니다."

짧은 대화를 마친 그들은 빠르게 루케오를 향해 달려갔다.
밤공기는 차가웠지만, 달빛 아래 어깨에 걸린 망토는 따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