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베인과 루비아는 조용히 마주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루비아가 직접 구운 쿠키와, 에델베인이 꺼낸 와인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짧게 나누었다. 사소한 이야기들이 오갈수록 방 안의 공기는 점점 부드러워졌고, 창문으로 흘러든 달빛이 은은하게 그들을 감쌌다.
에델베인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촛불을 켰다. 작은 불꽃이 흔들리며 그의 얼굴선을 따라 빛을 그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루비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오늘 보자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에델베인은 잠시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단장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안에는 묘한 무게가 섞여 있었다.
"물론, 많은 걸 말한 것은 아닙니다. 루케오와의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사건에 대한 보고 정도였죠."
"단장님께서는 뭐라고 하셨나요?"
"왕국의 안전을 위해, 루케오의 수장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루비아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와인잔을 굴렸다. 잔 안에서 붉은 액체가 흔들릴 때마다 촛불의 불빛이 깜빡이며 그녀의 얼굴 위로 흩어졌다.
에델베인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단장님은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엄격하신 면도 있지만... 정의롭고 따뜻한 분이에요...
저또한 기사단과 확실하게 협력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셨으면 합니다. 기사단과 루케오, 서로의 신뢰를 쌓기 위해서라도요."
그의 눈에는 걱정과 진심이 함께 어렸다.
루비아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들어 살짝 미소 지었다.
“에델베인님의 말씀도, 단장님의 뜻도 이해됩니다. 기사단과 협력하고 싶다는 것은 저의 마음이기도 했구요.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가 좋을까요?”
“내일 오후가 좋겠습니다. 그때는 다른 기사들이 훈련 중이라, 눈에 띄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에는 남성을 찾아갈 생각입니다. 오후에는 쭉 루케오에 있을 예정이니 데릴을 통해 연락해주시면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위험 할 수도 있는데 저희의 요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걱정 어린 말에 루비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에델베인님께서 지켜주실 거잖아요."
그녀의 미소에 에델베인은 잠시 멍하니 바라보더니, 이내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당신을 지키는 것... 당연한 일입니다."
짧지만 따뜻한 공기가 흐른 뒤, 루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에델베인님, 푹 쉬세요."
천천히 창가로 향하는 그녀의 뒤로 에델베인이 조용히 따라섰다.
루비아는 떠나기 전,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또 얼굴 뵐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 말에 에델베인은 순간 말을 잇지 못했다. 귀끝이 붉게 물들며 그는 뒷목을 문질렀다.
백금빛 머리카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도... 만나서 기뻤습니다."
루비아가 그의 모습에 살짝 웃음을 지었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밤바람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네, 루비아씨도 조심히 돌아가시고,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비아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에델베인은 한동안 그녀가 사라진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방 안에는 그녀의 향기만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루비아는 아삽과 함께 남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선 모습은 기대하고 싶었던 결과와는 다른 모습으로 그들을 반겨주었다. 루케오로 돌아온 그들은 회의실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의 표정이 무거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금만 더 주의했더라면…" 케인이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케인 씨의 잘못은 아니에요." 루비아가 단호히 말했다.
"하필 병실에서 죽어서 해부도 불가능하군."
"어..어이..." 하비의 낮은 중얼거림에 라코타가 움찔했다.
"의료진 말로는 새벽부터 경련이 시작됐고, 얼마 못 버티고 사망했다고 해요. 심장마비였다고 하더군요."
"그럼... 꽃이 원인도 아니겠네."
"그렇."
짙은 침묵이 흘렀다.
그 공기를 깨뜨린 건, 다시 루비아였다.
"이렇게 된 건 어쩔 수 없어요. 우리도 조금은 방심했죠. 다음엔 더 신중하게 움직이면 돼요. 기운 냅시다!"
그녀의 힘찬 말에 모두 고개를 들었다.
"중요한 단서가 사라졌다는 것은 아쉽지만,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에요."
"무슨 말이야, 대장?" 아삽이 물었다.
"오늘 오후, 아도니아 왕국의 기사단장과 만나기로 했어요."
"뭐어???!!"
"오늘?!"
라코타와 케인이 큰 소리를 내며 말했다.
회의실은 순식간에 술렁였다.
"계약이라도 쓰려고?" 하비가 조용히 물었다.
"그 자는 루케오가 왕국에 위험이 가지 않는 존재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그들이 신용 가능 한 자들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야."
"너가 에델베인 그 자를 믿고 있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그 자도 귀족이고 왕국 소속 인물이다. 나는 솔직히 완전히 신용할 순 없어."
"알고 있어."
"위험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지."
"하아...."
덤덤하게 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하비는 한숨을 내쉬었다.
"같이가."
"안돼."
단호했다.
"이것은 기사단장과 루케오의 수장, 두 사람만의 대화야."
루비아는 잠시 모두를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혹시 제가 잡혀 들어가게 되면 데릴이 루케오로 올 겁니다. 그 때는 몸을 숨기세요."
"너...!"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루비아는 차분히 이어갔다.
" 난 그를 믿어. 그리고 여러분들과 약속했습니다. 만약 그가 나를 배신해 루케오에게 위험이 된다면ㅡ"
루비아의 보라빛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내가 직접 그를 죽일 거예요."
그 말에 아무도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잠시 후, 아삽이 손을 번쩍 들었다.
"대장이 잡혀가면 내가 구하러 갈 거니까 걱정 마!"
"맞습니다! 저 라코타!! 왕국을 무너트려서라도 루비아씨를 구할 것입니다!"
케인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루비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그녀의 머리에 하비가 살며시 손을 얹었다.
"뭐, 다들 그렇게 생각하."
이야기가 끝난 후, 회의실에는 루비아와 하비만 남았다. 서로 조금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다리에 쪽지가 묶여있는 데릴이 창문을 두드렸고, 루비아는 망토를 걸친 채 왕국으로 향할 준비를 하였다. 하비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백호 형상의 가면을 건넸다.
"아까는 미안. 괜히 심하게 말했네."
루비아는 부드럽게 웃었다.
"걱정해서 그랬다는 걸 알아. 그리고 너가 한 말도 틀린 말은 아니야. 모두가 나를 믿어주고 있지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건 사실이니까."
"널 믿어."
"알고 있어."
"너의 감은 틀린 적이 없으니까."
루비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 밖으로 향하는 그녀를 향해 하비는 루비아의 손을 붙잡았다.
"왕국에는 수많은 귀족들이 있어. 조심해. 그자도.... 있을 수도 있어."
"그래. 조심할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비아는 왕국으로 향했다. 에델베인이 보낸 쪽지에는 왕국 서쪽 회랑 끝 첫 번째 탑 아래에서 만나자고 적혀있었다. 루비아는 빠르게 그 쪽으로 향했다. 멀리서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그가 보였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그를 비추었고, 마치 숲의 정령인 것 같다고 루비아는 생각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기다린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에델베인은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지도를 따라 움직이세요. 비상 탈출로입니다.
하지만, 걱정마세요. 제가 항상 곁에 있을 테니까요."
에델베인은 루비아를 손을 내밀었다.
"준비되셨나요?"
"네."
루비아는 그의 손을 마주 잡고, 그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함께 걸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왕국의 하녀들과 병사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에델베인은 지나가는 하녀들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루비아 앞에 서서 그녀를 가렸다. 그의 이런 행동에 루비아는 순간 미묘하게 숨이 멎는 듯했지만, 곧 다가올 만남에 대한 긴장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그런 그녀와 달리, 에델베인의 귀끝은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는 것을 — 그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은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에델베인은 루비아를 바라보았고,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깊게 심호흡을 내쉰 후 문을 세 번 두드렸다.
"에델베인 카멜리아스입니다."
"들어오게."
밝은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기사단장의 집무실은 놀라울 정도로 정갈했다.
벽에는 여러 지도와 문서들이 정돈되어 걸려 있었고, 중앙에는 무거운 참나무 책상이 놓여 있었다. 그 뒤로 앉아 있는 백발의 남성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루비아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 시선 속에는 묵직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에델베인은 조심스레 문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저번에 말씀드린 그 분을 모셔왔습니다."
그러나 기사단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루비아를 응시했다.
그의 기세는 압도적이었으나 루비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그의 시선을 받아내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고 그녀의 뒤를 따라 에델베인도 조용히 발을 옮겼다.
곧 그녀는 그의 바로 앞에 섰다.
루비아는 천천히 망토를 벗었다. 그러자 그녀의 검고 긴 곱슬머리가 찰랑이며 허리까 떨어졌다.
그 순간, 에델베인은 놀란 듯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무슨...!"
루비아는 그런 그를 올려다보며 에델베인의 가슴에 손을 올려 진정시키듯 두 번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그를 밀어내며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가면의 끈을 향해 손을 뻗는 그녀의 동작은 느리고, 조용했다.
에델베인이 막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루비아는 망설임 없이 가면을 벗어 들고 기사단장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루케오의 수장, 루비아입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곧이어 기사단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처음보지. 아도니아 왕국의 기사단장을 맡고 있는..."
그는 미소를 지으며 이름을 뱉었다.
"헤드거 카멜리아스이네."
루비아의 눈이 점점 커졌다.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기사단장과 에델베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헤드거.... 카멜리아스요?!!!!"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뻗어오는 그의 손을 잡지도 못한 채, 루비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기사단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에델베인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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