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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머문 자리

사건의 시작: 천고마비의 계절(2)

by Rang랑 2025. 10. 2.

서서히 하늘이 밝아올 무렵, 그들은 마침내 루케오에 도착했다. 
남성을 치료소로 보낸 뒤, 먼저 도착해 있던 아삽이 그들을 맞이했다.


"대장, 수고 많았어."

그녀의 얼굴에는 밤을 새워 피로가 묻어 있었지만, 눈빛에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남성은?"

"가벼운 외상뿐이래. 내일쯤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야."

"좋아. 케인은 아직 지하실에 있지?"


아삽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그 순간, 루비아는 망설임 없이 지하실로 내려갔다. 
문을 열자 눅눅한 공기와 함께 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희미한 등불 불빛 속, 바닥에는 이미 싸늘해진 남자가 쓰러져 있었고, 그 앞에는 시선을 들지 못한 채 케인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케인?"


그 목소리에 케인은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죄송합니다. 입 안에 독약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입마개를 푸는 순간, 피를 토하며 그대로ㅡ 죽었습니다..."


뒤따라온 하비가 묵묵히 그의 곁을 지나쳐 시신의 입을 벌려 살폈다.


"독 맞네."

"죄송합니..다. 이런 실수를..."


케인은 땅만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냈다.
루비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천천히 다가가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정신을 차리자마자 죽음을 택할 만큼 충성심이 강한 자였어요. 어떤 방법을 써도 입을 열진 않았을 겁니다."



그녀의 위로에 케인은 짧게 끙끙거렸다. 
하비가 다가와 묵묵히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선, 회의실로 가지. 우리가 찾은 것이 있으니."

"설마..."

"그래, 아삽. 예상이 맞았."



하비의 말에 루비아는 작은 가방을 열어, 시든 듯 비틀어진 피처럼 붉은 꽃 한 송이를 꺼냈다.



"그 꽃!"



아삽의 목소리가 본능적으로 높아졌다.
루비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 꽃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문 옆에 기대어 있던 에델베인이 낮게 물었다.


"그것이 무슨 꽃입니까?"


그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경계가 뒤섞여 있었다.
루비아는 잔잔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회의실로 돌아가죠. 거기서 설명드리겠습니다."



회의실.
책상 위에 놓인 붉은 꽃은 방 안의 공기를 장악하듯 존재감을 풍겼다.
루비아는 덤덤한 목소리로 에델베인을 향해 설명을 시작했다.
그녀가 꺼낸 이야기는, 에델베인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겁고 위험했다.

크림슨 앙겔루스. 피처럼 붉은 천사.
시트러스 같은 상쾌한 향을 풍기는 꽃이며 외형은 마치 장미와도 같다. 땅에 뿌리내릴 때는 눈처럼 희지만, 뿌리를 뽑거나 줄기를 꺾는 순간 피처럼 붉게 변하며, 줄기가 아닌 잎사귀에서 가시가 돋아난다. 그리고 그 순간, 달콤하면서도 이질적인 향이 강렬히 퍼지며, 맡기만 해도 환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위험한 식물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 꽃에는 기이한 기원담이 존재한다. 

바다를 항해하다 해적에게 쫓기던 한 사내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채 무인도의 깊숙한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거대한 나무가 있었고, 그 아래에는 새하얀 꽃이 끝없이 만개해 있었다. 
그는 피투성이 몸으로 꽃밭에 발을 들였다. 
그 순간, 찢겨 있던 살이 봉합되듯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고, 극심했던 통증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 기적 같은 힘에 탐욕을  느낀 그는 꽃이 상하지 않도록 흙과 함께 들어 올려 자신의 화원에 옮겨 심었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연인에게 이 아름다움을 나누고자 꽃 한 송이를 꺾어 그녀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그러나 빠르게 붉어져 가는 꽃과 함께 연인의 눈동자는 허공을 헤매더니, 마지막 숨결과 함께 나직이 속삭였다. 

"아.. 신의 사자이시여..."


사내는 깊은 슬픔과 함께 분노에 휩싸였다. 그는 꽃을 불태워버리려고 했다. 
그러던 중, 바닥에 퍼진 연인의 피가 흙을 적시며 그에게 또다시 기적을 보여주었다.
죽어가던 풀들이 살아났고, 나무와 꽃들은 마치 새 생명을 되찾은 듯 왕성하게 자라났다.
사내는 넋을 잃은 채 흐르고 있는 연인의 피에 손을 대었다.
그 순간, 짜릿한 황홀감과 함께 몸에 남아 있던 흉터들이 사라지고 탁해진 피부는 순식간에 젊은 시절의 빛을 되찾았다.

젊어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그는, 붉은 꽃과 함께 빠르게 말라가는 연인의 시체를 외면한 채  새하얀 꽃밭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까지가 이 붉은 꽃, 크림슨 앙겔루스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루비아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회의실 안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그 자가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군요."


루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는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람들을 납치해 실험했습니다. 대부분 꽃이 피부에 닿는 순간 죽었고, 살아남은 자도 오래 버티지 못했죠. 몇 명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에델베인은 꽃을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런데... 루비아씨는 어떻게 이 일을 이렇게 자세히 알고 계십니까?"


짧은 침묵이 흘렀다.
루비아는 살며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이것이 루케오의 힘이죠. 
...해가 떴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밖은 이미 눈부신 아침 햇살로 가득했다.
하나둘 회의실을 떠나는 이들.
남은 건 에델베인과 루비아뿐이었다.

망토를 고쳐 입은 에델베인은 창가에서 잠시 빛을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루비아씨.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위험한 상황에는 혼자 행동하지 마세요. 오늘처럼 예상치 못한 공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걱정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진심이 묻어났다.


"이만 저도 돌아가겠습니다. 아침 훈련이 있어서요. 무슨 일이 있다면 데릴을 통해 연락드리겠습니다. 루비아씨도 이만 푹 쉬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조용히 회의실을 떠났다. 
루비아는 홀로 남아, 서서히 가루가 되어가는 붉은 꽃을 바라보았다.
무거운 침묵을 깨트린 건 하비였다.


"안 자?"

"자야지."


꽃은 이내 바람처럼 흩어졌다.
루비아는 손바닥에 남은 가루를 꽉 쥐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날 정오.
훈련을 마친 에델베인은 땀에 젖은 갑옷을 벗고 정돈된 차림으로 기사단장의 집무실 앞에 섰다. 문고리를 잡기 전, 그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긴장이라기보다, 무게감을 다잡는 호흡이었다.

똑, 똑.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문을 열자 집무실 안에는 커다란 창문을 등지고 앉은 남자가 있었다. 짧게 깎은 흰머리, 굳은살처럼 거친 얼굴, 그리고 옆에 놓여 있는 거대한 검. 그는 글자를 훑는 시선조차 매서웠다.
기사단장, 동시에 에델베인의 친할아버지ㅡ 헤드거 카멜리아스였다.



"단장님, 저번에 말씀드린 건에 대해 대해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에델베인은 차분히 서류를 건넸다.
헤드거는 그것을 묵묵히 읽어 내려갔다. 잠시 후, 그는 서류 위에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단순한 실종 사건이 아니구만... 귀족 정도의 자금과 세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야..."



무겁게 흘러나온 말 뒤에는, 가라앉은 숨이 섞였다. 그리고 곧 다시, 날카로운 질문이 이어졌다.



"루케오라 했나. 얼굴조차 알려지지 않은 비밀 조직인데... 어떻게 접촉했지?"



그 눈빛은 칼끝처럼 매서웠다. 그러나 에델베인은 흔들리지 않았다.
굳건히 선 채, 단호히 입을 열었다.



"자세한 경위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저는 루케오의 안전을 보장하기로 약속했고 그 대가로, 오늘 새벽의 건을 포함해 사건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제공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사건에 대해 수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말을 잇기 전, 에델베인은 숨을 고르듯 짧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므로, 공식적인 협조를 요청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헤드거는 묵직한 한숨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에델베인... 너도 알다시피 귀족들은 루케오와의 협력을 달가워하지 않아. 왕실 또한 그들을 예의주시하고 있지."


"협력은 비밀리에 진행할 것입니다. 그들의 정보에 따르면, 이번 사건의 배후엔 귀족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 소식이 퍼지면, 관련된 자들은 곧장 발을 뺄 겁니다. 그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하지만, 루케오와 기사단 둘 다 각자만의 힘으로는 사건을 해결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때문에 저희도 그들도 서로의 힘과 정보가 필요합니다."

그 단호한 목소리에, 헤드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 손을 뻗어 에델베인의 머리를  험상궂게 쓰다듬었다.



"좋다. 내가 직접 왕께 보고하마. 하지만 그 전에...."



손길을 멈추고, 그의 눈빛이 깊어졌다.



"루케오의 수장을 만나야겠지."

"단장님...!"

"왕실의 안전을 걸린 일이다."



짧지만 단호한 말에 에델베인은 잠시 그를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접촉이 성사되면 곧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집무실을 나서는 그의 등을 향해 헤드거가 낮게 덧붙였다.


"주말에는 집에 들러라. 네 할머니와 네 어머니가 성화다. 다들 보고 싶어 안달이야."

"네, 할아버님."


에델베인은 잠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창문을 열었다. 따뜻한 햇살이 스며들었고, 바람이 흩날리며 그의 금빛 머리칼을 흔들었다. 에델베인은 목에 걸려 있던 작은 피리를 꺼내 입술에 댔다. 
짧고 가느다란 소리가 공기를 타고 흘렀다.

이렇게 작은 음색을, 데릴이 과연 들을 수 있을까?
잠시 의문이 스쳤지만, 곧 멀리서 검은 날개가 빠르게 날아왔다.

창가에 내려앉은 거대한 검은 새, 데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를 바라보더니, 마치 보상이라도 요구하듯 날개 끝으로 그의 팔을 톡톡 쳤다.


"간식부터냐.."

에델베인은 웃으며 책상 위의 육포를 꺼내 던졌다. 데릴이 만족스럽게 받아먹는 사이, 그는 짧은 쪽지를 써서 그의 다리에 묶었다.



"잘 부탁한다."


말이 끝나자, 까마귀는 힘차게 날아올라 하늘로 사라졌다. 그 검은 점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쯤, 문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델베인은 창 밖을 한 번 더 바라보고 나서,  옷깃을 정돈한 뒤 방을 나섰다.


정오가 지났건만, 루비아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데릴은 그녀의 방으로 날아들어, 작은 울음소리로 기척을 냈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곧장 그녀의 몸 위로 폴짝 내려앉았다.


"무... 무거워 데릴."


신음과 함께 눈을 뜬 루비아는 그의 다리에 묶인 쪽지를 발견했다. 



"으윽... 쪽...쪽지?"



쪽지에는 짧은 인사와 함께, 오늘 밤 9시, 북쪽 숲 가장자리에서 만나자는 글귀가 적혀있었다.
루비아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데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쪽지를 바라보다 이내 결심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는 튜베로즈 식당으로 향했다.


해가 기울며 노을빛이 창가를 물들이던 무렵. 
긴 하루를 마친 에델베인은 지친 몸을 이끌고 방으로 돌아왔다. 창문을 열자 바람이 불어들며 그의 젖은 머리칼을 스쳤다. 물 한 잔을 마시고 침대에 앉아 신발끈을 푸는 움직임은  평소보다 한결 무거웠다. 

그 순간, 창가에서 바스락거리는 작은 소리가 났다.
에델베인은 즉시 긴장을 되찾았다. 손이 반사적으로 검으로 향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자, 그는 날카롭게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시야에 들어온 건ㅡ



"좋은 저녁이에요!!"

질끈 묶은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리며, 환하게 웃고 있는 루비아였다.



"루비아씨?!"


에델베인은 깜짝 놀라 검을 거두었다.



"위험했습니다!!"

"죄, 죄송해요."

"어떻게 제 방을..."

"아, 그게 데릴이 알려줬어요...."


나뭇가지에 선 루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와서 죄송해요. 오늘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서..."


그녀는 바구니를 내밀었다.


"다...달콤한 걸 드시면서 좀 쉬셨으면 해서요... 그.. 저는 잠을 푹 자서 괜찮은데, 에델베인님은 한숨도 못 주무시고 훈련에 업무도 하셨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제가 찾아가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죄송합니다..."


루비아의 말은 서툴고 더듬거렸지만, 그 속의 진심은 그대로 전해졌다.
에델베인은 그녀를 바라보며 처음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방금 전, 자신이 그녀를 다치게 할 뻔했다는 사실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의 말에 심장이 따뜻하게 간질거렸다. 오늘의 피로가 단숨에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그는 창문을 더 활짝 열며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큰 소리를 내버렸습니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쿠키인가요? 피곤하신데도... 고맙습니다."


루비아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왔다. 방 안은 단정했고, 벽에는 카멜리아스 가문의 문장이 걸려 있었다. 루비아는 소박하지만 품위가 느껴지는 방을 둘러보다가, 의자를 권하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노을빛에 젖은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씻고 돌아온 듯 촉촉히 젖은 머리칼, 얇은 흰 셔츠 사이로 은은히 드러나는  체격.

루비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어졌다.
늦은 시간에 찾아온 자신이 실례가 아닐까 불안이 몰려왔다.

에델베인은 그녀의 그런 모습을 알아차린 듯, 잔잔히 미소지었다.
그리고 의자를 당겨주며 말했다.

"괜찮다면, 같이 드시겠습니까?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죠."

루비아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애써 감추며, 아무렇지 않은 척 그의 곁으로 걸어갔다.

 

 


한동안 바빠서 업로드가 늦었습니다... 열심히 업로드 해야하는데... 죄송합니다...
로맨스는 슬슬 시작할 것입니다. 후후 루비아와 에델베인이 빨리 좀 사귀든 꽁냥꽁냥 했으면 좋겠네요.